주제:토플 읽기 중재 서면
광화문, 한서 국제법률사무소 이십삼 (층) 중재팀 회의실이었다. (탁자) 위에 보험사 (답변서) 두 부와 남미 항만청 조사 (보고서) 원문이 (놓여 있었다) . 원문은 스페인어로 마흔 쪽이었다.
중재팀장 남궁현 (변호사) 님이 (원문) 을 내 쪽으로 밀었다. “차 변호사는 번역 (담당) 이잖아. (서면) 은 우리가 쓸 테니까 이거나 (충실히) 옮겨 줘요. 해석은 붙이지 말고요.”
나는 차은재, 서른넷, 이 로펌의 변호사다. 팀에서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은 나 (하나) 라서 남미 쪽 사건이 (오면) 번역은 늘 내 (몫) 이었다. 팀장님은 내가 (신입) 때부터 존경하던 (선배) 였다.
사건은 (단순해 보였다) . 우리 의뢰인 동해해운의 화물선이 남미의 한 (항구) 에 묶여 있던 밤, (선미) (뒤쪽) 의 컨테이너에서 큰 (불길) 이 일었다. (선원) 들은 모두 항구 숙소에 있었고, 컨테이너 여섯 개가 잔해만 남았다.
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을 (거절했고) , 의뢰인의 (불만) 은 컸다. 답변서의 핵심은 (전쟁) 위험 (면책) (조항) 이었다. 전쟁, 혁명, (정권) 교체로 생긴 (손해) , 그리고 군대나 무장 세력의 (전투) 와 급습으로 생긴 손해는 보상하지 않는다.
보험사는 항만청 보고서의 영어 번역본을 (근거로 들었다) . (사고 당일) 오후 무장 세력이 부두에 (난입해) 급습을 벌였고, 그 (혼란) 속에 침입자가 컨테이너에 불을 냈다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. 그 조항은 보험사에게 꽤 (튼튼한) (방패) 였다. 피해 갈 길은 없어 보였다.
보험사는 이 사건에 대형 로펌 (두 곳) 을 (동원했다) . (최악의 경우) 의뢰인은 컨테이너 여섯 개의 (손해) 를 고스란히 (떠안는다) .
번역은 사흘이 걸렸다. 방해될까 봐 (메신저) 도 (껐다) . 문장을 하나씩 옮기다가 열두째 쪽에서 손이 멈췄다.
보험사 (번역본) 이 ‘급습’이라고 옮긴 단어는 원문에서 ‘ (해군) 의 정기 승선 점검’이었다. 그 항구에서 해군이 한 달에 한 번 하는 (일) 이었다. 점검은 오후 네 시에 (시작해) 다섯 시에 끝났다.
(어딘가) 어색해서 번역을 잠시 (중단하고) , (직감) 으로 사전을 (다시) 펼쳤다. 사전도 같은 뜻이었다. 보험사 번역본은 (특정) 단어 하나를 전혀 (다르게) 옮긴 것이었다.
연기 감지기가 (울린) 건 밤 열한 시 사십 분이었다. (점검) 이 끝나고 여섯 시간 사십 분 뒤였다. (경비원) 이 (즉시) 항만 긴급전화로 신고하고 (소화기) 두 대를 들고 뛰어갔다고 적혀 있었다.
(조사관) 은 그날 밤 (기온) 까지 적었다. 영상 육 도, 쌀쌀한 밤이었다. 컨테이너 (주변) 바닥도 (사진) 으로 남겨 두었다.
조사관의 결론은 열여덟째 쪽에 있었다. 컨테이너 (문) 의 (빗장) 은 밖에서 잠긴 채 그대로였다. (침입자) 의 흔적은 없다. 불은 안쪽에서, (유해한) 화학물질 컨테이너와 (냉동) 컨테이너가 맞닿은 자리에서 시작됐다.
위험물을 냉동 컨테이너 (옆에) (싣지) 말라는 항만 규정이 따로 있었다. 하역업체는 그 (위반) 행위로 (벌금) 을 냈다. 요컨대 이 불은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적재 (사고) 였다.
나는 번역본 (맨 앞) 에 한 쪽짜리 (요약) 을 붙였다. 보험사 번역본과 원문이 다른 대목 세 군데에는 노란 (표시) 도 했다.
(저녁) 여섯 시, 번역본을 들고 팀장님 (방) 에 갔다. 팀장님은 요약 쪽은 (넘겨) 버리고 본문 첫 장만 본 뒤 번역본을 돌려줬다.
“번역 담당이 사건 (이론) 까지 짜요? (해석) 은 붙이지 말라고 했잖아요. 표시한 건 다 (지우고) 원문만 옮겨 와요. 대략적인 (내용) 만 알면 됩니다.”
(반대할) 틈도 없었다. 팀장님 (표정) 은 이미 다음 서류에 가 있었다.
(자리) 로 돌아와 노란 표시를 지웠다. (대신) 원문 쪽수와 (줄) 번호를 (각주) 로 달았다. 번역에 출처를 다는 건 번역 담당의 일이었다. 그 (경계) 는 넘지 않았다.
(밤) 열 시, 사무실이 (거의) 비었을 때 팀장님이 내 (자리) 로 왔다. 손에 내 번역본이 들려 있었다. 각주가 달린 쪽마다 모서리가 (접혀) 있었다.
“열두째 쪽 각주, 원문 (좀) (볼) 수 있어요?”
팀장님은 의자를 옆으로 (당겨) 앉고 (펜) 을 집어 들었다. 나는 원문을 (펼쳐) 그 줄을 짚었다. 팀장님은 휴대전화 사전으로 단어를 (직접) 찾았고, 열여덟째 쪽 빗장 문장까지 (확인하고)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.
“보험사 번역본이 (틀렸네요) . (사실상) 저쪽 (주장) (전체) 가 이 한 단어에 걸려 있었고요. 미리 알았으면 (반박) 서면 방향이 (근본적으로) 달라졌을 거예요.”
다음 날 (아침) 아홉 시, 동해해운 법무팀과 (화상) (회의) 가 있었다. 화면에 법무팀 세 사람 (얼굴) 이 (올라왔다) . 우리 팀 다섯 명이 회의실에 (모였고) , 나는 늘 그렇듯 끝자리에 (앉았다) .
화면이 켜지자 (팀장님) 이 (먼저) (말했다) . “어제 제가 차 변호사를 번역 담당이라고 했습니다. 그 말은 (취소할게요) . 보험사 (주장) 의 가장 치명적인 (약점) 을 차 변호사가 (찾았습니다) .”
팀장님이 이어 말했다. “ (반박 서면) (둘째) 장은 차은재 변호사가 (씁니다) . 서면 표지 (대리인)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고요.”
나는 원문 열두째 쪽과 보험사 번역본을 화면에 (나란히) 띄웠다. ‘해군의 (정기) 승선 점검’과 ‘ (급습) ’. 한 단어 (차이) 로 사건의 성격이 바뀌었다.
법무팀장이 (물었다) . “보험사가 (일부러) 그렇게 (옮겼을까요) ?” 회의실에 잠깐 (긴장) 이 돌았다.
나는 고개를 (저었다) . “그건 (가능성) 낮은 이야기예요. 누구를 (비난할) 일도 아니고요. 원문을 그대로 (제출하고) 중재판정부가 직접 읽게 하는 게 가장 (투명하고) 바람직합니다.”
팀장님이 고개를 (끄덕였다) . “ (번역) 공증은 차 변호사 이름으로 받읍시다. (원문) 이 우리 쪽 (핵심) 증거니까. (제시간에) 맞추려면 오늘 넘겨야 해요.”
(회의) 가 끝나고 (메일) 알림이 떴다. 제출 (직전의) 반박 서면 표지 (초안) 이었다. 대리인 명단 맨 아래에 내 이름이 있었다. 나는 원문 열두째 (쪽) 에 붙여 둔 노란 (메모지) 를 떼어 냈다.